CSS

<메스부타>

<메스 부타>는 작가의 성폭행 피해로부터 출발한다. 성폭행의 트라우마는 벗어나려 노력해봐도 예상치 못한 순간 발동되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순간을 공포로 만들어버리곤 했다. 불현듯 트라우마에 지배되어 버리는 삶. 코카시는 당시의 충격과 상처를 가시화해 돼지 껍데기에 새겨내고, 그것이 그의 일상을 어떤 식으로 잠식하고 있는지 사진 작업을 통해 드러냈다. 이는 홍대 거리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거리에 놓임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메스 부타는 내가 사고에 노출되었을 당시 들었던 점몰어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다. 단순히 암컷 가축이라는 말은 타투가 되어 그의 몸에 새겨졌다. 그 타투는 본인의 아픔을 감수하고 도려내지 않는 이상 평생토록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밥을 먹으러 편의점에 들러도, 스쳐 지나갈 거리를 걸을 때에도, 심지어는 허공 어딘가를 흐린 눈 하고 있을 때에도. 잠시 흐려질 수는 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_작가노트 中

<육인의 연혁>
<육인의 연혁>은 성폭행의 트라우마를 자신의 일부로 인정할 수밖에 없던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성폭행의 상처는 돼지껍데기 오브제로 가시화되고, 이는 현우와 건우라는 가해자의 이름으로 박제된다. 영상 속 일상의 순간에 등장하는 돼지껍데기 오브제는, 살아가기 위해 일상에 덧씌워지는 끔찍한 잔상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작가의 삶을 드러낸다. <육인의 연혁>과 <현우>, <건우>는 홍대 거리라는 일상의 장소에 놓임으로써, 일상적 순간에서도 떨쳐낼 수 없는 상처의 메커니즘을 보다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영상과 오브제를 함께 설치하는 방식을 통해 관람자가 작가의 상처를 신체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한다. 영상 작업을 보기 위해 관람자가 서는 위치에서는, 보려고 하지 않아도 시야각에 양옆에 설치된 돼지껍데기 오브제가 인식되며, 육인(戮人), 곧 죄인이 되어 자신의 연혁(沿革)속에 성폭행의 흔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코카시의 상처를 떠올려 볼 수 있다.



<Waduprayfo>
<뒤로듣는 기도>

지금 이 시대에 천사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바로잡을 것도, 도와줘야 할 자도 너무 많아 쉴 틈 없이 비명이 귀에 들어와 꽂힌다. 코카시가 <Waduprayfo>에서 그려낸 천사는 당연한 것들까지도 소원이 되어버린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대변하듯, 온몸에 상처가 난 채 기도하고 있다. 코로나는 끝날 듯 다시 거세지길 반복했고, 종식에 대한 확신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기엔 너무 희미한 십자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라는 희망이 점차 선명함을 잃어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래, 천사의 모습이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기도는 어떤 모습일까? <뒤로듣는 기도> 속 누군가의 기도는 마치 역재생한 음향처럼 어그러져, 자막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이 불분명하다. 코카시는 분명 비현실적이리만치 비극적인 시나리오였던 팬데믹 사태에마저 ‘적응’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이기 시작한 지금, 염원을 담은 기도를 떠올렸다. 분명 선명하고 간절했을 기도는, 계속되는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계속하여 반복될 뿐 그 간절함을 잃고 흐릿해지고 만다. 코카시는 차악을 위해 적응을 택하는 것은 어쩌면 회복의 기회마저 저버리는 것일지 모른다고, 말도 안 된다고 여겨지던 이 상황에마저 익숙해져가는 오늘날을 향한 경종을 울린다.


코카시

“의식 무의식 그리고 일상생활 중 경험하는 모든 것이 저에게는 소스가 되며 이것들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합니다. 따라서 제 삶은 갈아진 상태로 작업의 재료가 되고 작업의 최종 형태가 평면 페인팅이 될지 사진, 영상 혹은 퍼포먼스가 될지는 완성의 순간까지 미지수입니다.”
코카시는 회화로부터 디지털 프린팅, 영상 작업과 설치, 퍼포먼스까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예술적 실험을 이어간다. 그에게 예술이란 삶을 관통하는 표현의 수단으로, 살아가며 발생하는 영감의 파편들을 작업물이라는 형상으로 잡아 두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영상과 오브제 또는 회화가 함께 설치되는 혼합 매체 작업을 선보인다.